본문 바로가기

근현대 미술/한국 근현대미술

6. 박서보 (Seobo Park): 반복된 행위와 연속성을 수행하는 백(白)의 화가

728x90

묘법 작품 앞에서의 박서보 작가, 건강하게 오래 작품 활동하시길 바란다

박서보 (1930~)는 현재 단색화 열풍을 이끈 주역으로써 평가되어 지며, 현재 한국 미술시장에서 손꼽히는 (가격, 명성적으로) 톱 작가 중 한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박서보의 화풍은 한국 엥포르멜 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추상적이고 비구성적인 화풍은 동시대 엥포르멜 작가들의 스타일과 그 맥을 같이 했다고 보여진다. 

 

박서보, 회화 1-57, 1957

위의 그림은 전형적인 엥포르멜 작가로서의 화풍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박서보 작가의 엥포르멜 화풍은 사라지고 다양한 화풍을 지닌 작가로서 영역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박서보, 유전질 1-68, 1968,                                                           박서보, 유전질 9-69-70, 1970

 

위의 두가지 작품들이 박서보가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칭할 수 있는 '묘법'을 이용한 단색화 화풍을 구사하기 전의 실험적인 화풍적 시도들을 보여주는 듯 하다.

 

왼쪽의 기하학적 구성과 대비되는 단색들의 구조는피에트 몬드리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듯하며, 오른쪽의 유전질 작품은 초현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2년의 기간 사이에 이러한 극명히 대비되는 두가지 다른 화풍은, 그 때 당시 박서보 작가가 그만의 개성 넘치는 화풍을 찾기까지의 고뇌하는 과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요즘 한국 미술계의 단색화(모노크롬)란 것들은 어처구니없는 행위들이 되풀이되어 나온 결과물이랄까요.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내가 살펴본 한국 화단 작가들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태였어요. 크게 유행하던 앵포르멜 같은 추상이 한풀 꺾이고 팝아트 옵아트 같은 서구 미술흐름이 막 밀고 들어오는데, 뭘 해야 할지 막막해했지요. 처절하고 각박한 상황인데 뭔가 해야겠다. 그래서 긁고 뚫고 긋고를 되풀이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했고, 몇몇 작가들이 40년 이상 계속 벌여온 겁니다. 그게 대단한 거죠.”


노형석 기자, 단색조 대표 작가 박서보의 회고전이 개운치 않은 이유는? (2019), 한겨레

 

위의 기사는 이우환 작가의 인터뷰 내용인데, 그 때 당시 작가들이 새로운 화풍을 찾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뇌를 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의 두 유전질 그림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그림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일직선으로 구성된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선들이 박서보 작가의 단색화 화풍에 많은 영감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박서보, 묘법, 1973

반복적인 선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박서보의 대표적인 시리즈라 할 수 있는 '묘법'에 큰 영향을 미친 요소이며, 1973년에 명동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를 시작으로 백색의 '묘법' 단색화의 서막을 열게 되었다. 

 

초기의 묘법 시리즈가 두 개의 다른 면들을 경계하고 있는 선을 하나의 기준으로 각기 다른 배경색과 미세하게나마 묘법을 구성하고 있는 선들의 방향들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하나의 캔버스를 다른 두 공간이 차지하고 있지만 결국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하나로 보여지는 다르면서도 같은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박서보, 묘법, 1985

초기의 묘법 시리즈와 달리 80년대에 그려진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들은 선들의 숫자가 적어지고 각각의 선들이 갖고 있는 표현력들이 조금 더 담대해지고 거칠어짐을 볼 수 있다. 하얗게 펴바른 백색의 페인트 위에 힘 있게 그려진 선들은 작가에 의한 타의적 밀어내짐을 통하여 선 끝과 페인트 사이에서 자연스레 발생한 질감을 나타내며,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입체감마저 느끼게 한다. 

 

박서보의 묘법은 캔버스를 하얀 페인트로 덮은 후 그 위에 수 많은 같은 형태의 선들을 페인트가 마르기 전에 표현한다, 그 후 다시 페인트를 캔버스에 칠한 후 다시 같은 선들을 그리며 같은 행위들을 반복한다. 이러한 남겨진 선들, 혹은 자국들과 하얀 페인트 사이에서 발생하는 질감과 선들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백색의 공간은 묘법이라는 작품 자체의 물질성과 공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Agnes Martin, White Stone, 1964
Cy Twombly, Untitled, 1968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는 어찌보면 위의 두 작가, Agnes Martin (1912-2004)과 Cy Twombly’s (1928-2011)의 작품들을 합친 버전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수직적이며 수평적인 선들을 이루고 있는 네트와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Agnes의 작품, 그리고 수 많은 반복되는 선들을 표현한 Twombly의 작품들은, 박서보의 묘법 시리즈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서양 단색화 작품들을 모방한 작품으로 보일 수 있다. 

 

박서보, 묘법, 1985

그러나 박서보의 묘법에서 표현된 수 많은 선들은 참으로 한국적인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청자에 쓰여진 상감기법과 조선시대의 분청사기의 문양과 아주 흡사하다고 볼 수 있다.

 

보물 346호 청자상감진사모란문매병, 13세기, 고려 크으으으으으으으으 이쁘다

 청자 표면에 청자 유약을 바르기 전 문양을 새기고 그 위에 원하는 색을 채운 후, 표면 전체를 유약을 바른 후 다시 색을 입힌 문양의 표면을 얇게 긁는 상감 기법이 박서보의 채우고 그리고 다시 채우는 행위와 연관이 있으며

 

분청사기조화모란문병, 15세기, 조선 크으으으으으으 이건 더 이뻐 

 하얀 바탕 위에 과감한 선들을 표현한 박서보의 묘법은, 조선시대의 분청사기 조화기법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두가지 전통적인 기법에서 따른 박서보의 묘법은 전통 한국문화와 큰 연관이 있으며, 여기서 발전하여 박서보는 다른 형태의 묘법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박서보, 묘법 No. 990109, 1999
박서보, 묘법 No.060728, 2006

 

199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형태와 매개체로 묘법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번에는 페인트로 캔버스를 덮는 본래 해오던 방식의 묘법이 아닌, 몇겹의 젖은 한지들을 캔버스에 붙인 후 갖고 있는 도구들과 반복성을 이용해 확연하게 드러나는 선들과 비워진 공간들을 표현함으로써 대담하면서도 균일한 캔버스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공간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기법의 묘법은 캔버스 위를 '그린다'라기 보다는 그가 주장하는 '채운다'라는 공예성을 지닌 행위로 성공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라 보여진다. 

 

 

자 이제 조금 박서보 선생님을 까볼까 한다.

 

 

그의 작품은 한 달 넘게 물에 불린 한지를 캔버스에 붙이고 수 만 번 밀어내고, 긁어내고, 갈아내고, 덮어씌우고, 잘라내는 등 이와 같은 행위가 끊임없이 이어져 탄생된다.... 그래서 수 명의 조수를 두고 작업을 진행한다..... “개인적인 메시지가 강한 작품에는 조수를 두면 안 되지. 피카소나 고흐 작품에 외부 손이 들어오면 되겠어요? 하지만 나는 외부 손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좋아요. 내 작품은 손맛을 쌓아가는 일, 즉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이야. 내가 색을 개어 캔버스에 밀어서 완성시켜놓고 색 순서를 붙여놓으면 조수들은 그 순서대로 그러데이션해가며 손맛을 입혀가는 거지.”


이를 보고 ‘조수가 다 한다’는 혹자의 비판을 두고 그는 일갈했다. “베토벤이 작곡한 곡을 다른 사람이 지휘했다고 해서 그게 베토벤만의 곡이 아닌 게 됩니까? 건축가가 건축할 때 절대 혼자 하지 않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개입하는데. 작업 기본세계 콘셉트와 설정은 내가 다 해요. 다만 객관화를 위한 도구로서 개체가 필요한 것뿐이지. 내 작업에서는 내 손맛이나 누구 손맛이나 중첩되면 다 똑같아집니다.”
 

윤다함 기자, '한국현대미술의 아버지' 박서보 화백, "작가는 자기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2013), 서울문화투데이

 

 

읽고나니 참 어이가 없었다.

 

박서보 작가의 작품들 가격이 얼마씩 하는 줄 알고 있는가? 최소 천만원에서 억단위의 돈이 거래된다. 

작가가 나이가 들고 일이 많고 기력이 쇠하고 힘들면 예전의 기량만큼 작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작품을 사는 고객의 입장에서는 본인이 수억의 돈을 지불하며 산 그림이 박서보 작가가 직접 그린건지 아니면

박서보인척 하는 이름 모를 혹은 얼마를 받는지도 모르는 조수들이 그린것인지 누가 증명을 해주는가? 대작 문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통적으로 예술계에서는 계속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이슈이며, 이에 따라 수 많은 논쟁들이 오가고 있다 (이게 다 제프 쿤스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박서보 작가의 저 인터뷰는 뻔뻔하다 정말 뻔뻔하다. 

 

외부의 손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좋다는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개인의 개성이 드러나면 안된다는데 그럼 박서보의 개성을 보고 그림을 구매하고 감상하지 누구 개성을 봐야할까? 그리고 베토벤이 작곡한 곡은 베토벤이 작곡한거지 여러명의 조수들이 합심하여 작곡한 것이 아니다. 건축가가 건축할때는 당연히 수십명의 사람들이 참여한다. 건축이 그림과 같은가??? 건축가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거 같다. 박서보의 작품들 중 정말 거대하여도 5M를 넘는 작품은 없을텐데 그게 과연 건축과 비교할만한 대상인가? 내 손맛이나 누구 손맛이나 중첩되면 똑같다니 아니 그렇게 본인 작품에 자신이 없는건가 정말 읽는 내가 부끄러울 지경이다. 

 

본인이 저렇게 조수들과 함께 한 작품들이 자신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캔버스 밑에 참여한 조수들의 이름들 혹은 이니셜을 적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본인이 젊었을 적, 힘이 넘치던 시절에도 작품활동에 조수들을 썼는지 궁금하다. 

 

박 화백의 작업 특성상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남의 손을 도구로 삼아 중첩하며 손맛을 쌓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성을 억제하고 무명(無名)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조수가 다 한다’는 빈정거림은 그를 향한 오랜 비판 중 하나였다.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그러나 변하면 또한 추락한다.” 구순을 앞둔 노화백이 자기 말마따나 다시 한번 변화했다. 조수들을 내보내고 지팡이를 짚은 채 발을 끌면서도 홀로 이젤 앞에 서길 택했다.

 

윤다함 기자 “출렁 한번에 기우뚱… 그래도 연필 한 자루로 족하다” (2019), 아트조선 

(공교롭게 다른 신문 같은 기자님이 작성하신 기사다. 윤다함 기자님 화이팅)

 

 

최근 기사이며, 나이가 많은데도 직접 그리기 시작했다는 기사이다. 할 수 있으면서 왜 그랬을까? 

 

박서보 선생님 나이도 이제 지긋하시고 몸도 안좋으시고 본인 스스로도 죽음을 생각한다고 하신다.

이글을 작성하는 나는 나이도 어리고 배운 것도 짧고 이렇게 인터넷에나 심심해서 글을 쓰는 사람인데,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건 몸이 힘들고 작품활동을 계속할 기력이 없으시다면 이제는 붓을 놓으셔도 되지 않나 싶다.

 

한국의 단색화 열풍을 일으키신 정말 대단한 분이신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대단한 분이 조수들이 그렸다는 것을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건 정말 실망이다. 

 

내가 정말 돈이 많아서 값비싼 그림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과연 정말 내가 박서보 작품을 사고 싶어 할까?

저런 인터뷰를 하는 작가의 그림을 어느 사람이 사고 싶어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라면 절대 구매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