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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미술/고미술 도자기 이야기

매혹적인 비취색을 가진 한국만의 청자 - 고려청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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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한민국의 전통 도자기는 무엇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조선백자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대다수의 외국인들에게는 고려시대의 청자 혹은 조선시대의 분청사기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자기로 여겨진다. 대한민국의 전통 도자기는 청자, 분청사기, 백자 크게 3가지로 분류 되며, 가장 널리 알려진 도자기 종류이다.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토기와 청동기물에 대하여는 시장에서의 가치도 도자기에 비하여 낮으며,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게 현실이다. 필자 또한 배운 것이 짧아, 토기와 청동기물에 대해서는 공부를 더 많이 한 후 작성하려 한다. 

 

청자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 청자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청자는 '자기'로 분류되며, 주 재료인 돌가루가 들어간 자토 (일종의 돌가루)를 주 재료로 사용한다. 그 중에서도 고령토 (Kaoling)라는 가장 이상적인 자토가 중국 (강서성 고령산)에서 발견되었으며, 이 흙이 전세계적으로 자기 생산을 널리 퍼뜨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자토 속에는 유리질 성분들이 있는데, 이 성분들이 녹아야만 자기를 굽는 가마 안에서 주저앉아버리지 않게 된다. 자토 속의 유리질 성분이 녹기 시작하고 딱딱해지는 최소 온도가 1,200°C이며, 이 이상의 온도로 가마 속에서 유지를 하고 구워야지만 비로소 자기가 될 수 있다. 돌가루에 점력이 있는 흙을 섞어 자기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고려청자 중에서 가장 상급으로 여겨지는 '비색청자'는 자토를 사용한 것이고, 녹청자는 질이 낮은 흙으로 만든 것이다. 

 

태토를 빚고 초벌구이를 마친 후, 자기 겉면에는 '유약'이라 불리는 유리막 (석영)을 입히는데, 이 유약이 입혀져야 비로소 자기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쉽게 설명하여 청자 색을 내는 유약을 입히면 청자가 되는 것이고, 청자토에 백토를 바르고 투명유를 입히면 분청사기, 백토 태토에 투명유를 입히면 백자가 되는 것이다. 근대 도자사에 있어 고려청자의 장인으로 알려진 해강 유근형 선생님에 따르면, 청자 색을 내기 위해서는 고사리 재를 사용하며 약 3%정도의 철분이 함유되었을 때 비색 청자 색이 나온다고 한다.

 

청자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8.2*14.2cm / 청자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5.2*13.5*4.8cm

청자는 10세기 경 중국의 오대십국 혼란기에 북송이 들어서기 전 청자를 만들던 도예가들이 고려로 귀화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918년에 고려시대가 막을 열고, 역사적으로도 불교는 고려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큰 축으로 여겨졌다. 불교에서는 눈에 보이는 외부의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통한 해탈을 추구하였는데, 이러한 믿음은 초기 고려청자가 갖고 있는 무문 위주의 특성을 보여준다. 

 

10-11세기 청자완들,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6*15.2cm

고려시대의 청자는 시기에 따라 육안으로 어느정도는 나뉠 수 있다고 본다. 초기 청자 (10-11세기)는 대부분 누렇거나 녹갈색을 띄고 있으며, 초기 청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햇무리 굽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중국 당나라 후반인 9세기에 유행했던 형태이며, 중국을 통하여 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전해졌다는 또 다른 근거가 되기도 한다. 10세기 후반에 초기 청자가 만들어진 이후 전라도로 왕실을 옮긴 후, 강진과 고창을 중심지로 청녹색에 가까운 고려청자의 색이 만들어졌으며, 12세기 이후에는 강진과 부안에 위치한 가마에서 고려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청자연꽃잎무늬완,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8.5*16.7cm
청자음각연꽃넝쿨무늬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25.1*4.5cm

고려청자의 바닥을 보면 위 이미지와 같이 하얀 받침 자국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진위감정에 있어서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 규석받침 자국이라고 한다. 주로 3-4개의 규석받침 자국을 갖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다완의 경우에는 3개 그 외에 크기가 큰 기물들은 4개 정도로 보면 된다. 가끔 4개 이상의 규석받침 자국을 갖고 있는 기물들이 보이기도 하는데, 규석의 크기, 형태 및 색깔을 잘 확인하길 바란다. 규석받침이란, 도자기를 가마에 구울 때 균형을 잡기 위해 평평한 도지미를 받치고 굽는다. 그러나 가마 속에서 굽는 동안 유약이 흘러내리면서 도자기와 도지미 사이에 스며들어 달라붙게 되고, 다 식힌 후 무리하게 떼내려고 하면 밑바닥이 상해버리는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자기와 도지미가 잘 분리되도록 불에 잘 견디는 규석이 많이 들어간 흙을 작게 빗어 굽받침으로 사용한 흔적을 말한다. 후에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도지미에 모래를 뿌리거나, 갑발을 사용하여 굽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Brush-washer, Northern Song (1086-1125), British Museum,  9*13*3.3cm

 

12세기-13세기 전반 150년을 고려청자의 황금기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그 시대에 고려를 나타내는 비색 청자가 다양하게 만들어졌으며, 상감청자가 제작되기도 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고려의 청자 제작 기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그 때 당시 중국 역사상 가장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송나라 (북송 960-1127년)였다. 송나라, 특히 북송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것은 다양한 종류의 도자기 생산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송나라 도자기하면 가장 대중들 (도자기를 사랑하는)에게 각인된 종류는 여요 도자기라고 생각된다. 영어로는 Ru ware라 칭하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수 많은 가짜 도자기들이 대량으로, 그것도 아주 완벽한 품질을 자랑하는, 생산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아마 지금 이 글을 보는 콜렉터들 중에서도 여요 도자기를 갖고 있거나 혹은 딜러로부터 여요 도자기 구매를 제안받은 사람도 있을 것 이다. 안타깝지만, 아래 목록에 나온 수량을 제외하고 그 외의 여요 자기들은 가짜라고 판단하는게 좋을 듯 하다. 

 

Group of Ru ware pieces in the Percival David Collection, Northern Song (1086-1125), British Museum

21 pieces in the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17 in the British Museum, London (including the Percival David Collection) 
15 in the Palace Museum, Beijing 
8 in the Shanghai Museum 
2 in the Röhsska Museum, Gothenburg, Sweden 
with single pieces in the National Museum of China, Beijing; Tianjin Municipal Art Museum;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Hong Kong Museum of Art; Cleveland Museum of Art, Philadelphia Museum of Art; St. Louis Art Museum; Victoria and Albert Museum, and the Ashmolean Museum, Oxford. (해당 박물관마다 한점씩 있다)

 

총 대략 72점 정도는 전세계에 있는 박물관 및 경매장들 끼리 협약을 맺고 여요 자기의 진위감정 관련하여 위와 같이 수량을 파악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예외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전세계에 있는 도자기들을 위 박물관들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만큼 여요 자기 및 송나라 시대의 도자기들이 귀한 대접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청자 음각 연꽃잎 무늬 참외형 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25.8*10.9cm / 청자양이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21.5*8.2*13.3*8.1cm

이러한 중국 송나라의 영향이 고려의 청자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12세기 전반만 하여도 무늬가 없으며 중국 도자기의 기형을 흉내내는 작품들이 많았다. 참외형 병 및 양이병은 그 중에서도 고려 청자의 초기 작품으로 손 꼽히며, 위의 작품 중 양이병에 나타난 비색을 띄는 청자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청자 음각 연화당초문 매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43.9*7.3*26.1cm
태항아리, 고려, 국립민속박물관 / 청자 주전자 및 받침,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27.3*14.9*12.4*18.9cm

12세기 중후반을 넘어가며 음각과 양각 기법을 통한 문양들이 조금씩 새겨졌다. 사실 그 당시 유행하던 문양이나 기법들을 시대나 정확한 세기 혹은 년도로 나누는 것은 굉장히 무모한 행동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학자들의 고고학적 관점에서 분석된 결과이므로 최대한의 과학적인 검증은 거친 결과라고 생각한다. 맑은 비색에 음각으로 무늬를 넣는 기법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를 통하는 고려 청자의 큰 특징이며, 주전자는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전반에 많이 생산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출토품이나 우리가 볼 수 있는 주자들은 온전히 제 몸을 갖고 있거나, 뚜겅 혹은 승반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2세기 전반에는 비색청자 (무문) 12세기 후반에는 비색과 상감의 공존 그리고 13세기 이후에는 상감이 유행이었다고 보면 된다. 

 

청자상감포류수금문매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28.5*4.9cm / 청자 상감 모란당초문 표형 주자,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34.7*16*1cm

12세기의 고려시대가 차분한 문신 위주의 무늬가 없는 비색청자가 유행하던 시대였다면, 12세기 후반부터는 화려한 상감 기법을 적용한 상감청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3세기 고려 사회는 무신의 난을 겪으며 고려의 자주성을 강조하였으며, 이 때부터는 고려청자에 나타나던 중국 도자의 영향이 사라지게 된다. 음각한 표면에 백토 (흰색)와 자토 (검정색)를 태토에 문양을 따라 바른 후 표면을 미세하게 깍아낸 뒤, 초벌 구이를 마친 후 다시 청자 유약을 입히고 구우면 상감청자가 완성된다. 13세기부터는 표면에 적용할 문양에 청자 유약색을 드러내고 문양과 반대되는 배경에 상감을 적용하는 역상감 기법을 적용한 청자도 등장했으며, 이에 따라 다양한 무늬들이 유행하게 되었다. 국화문을 비롯하여, 매화, 학, 거문고 뜯는 사람 무늬, 운학문, 포류수금문, 포도문, 동자문, 여지문 등등 여러 무늬들이 유행하였다. 

 

청자 상감 국화당초문 대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6.2*16.8cm / 청자 집 사람 무늬 납작 항아리,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25.1*8.8cm

유약을 두껍게 바르던 무문, 음양각 비색 청자와는 달리, 상감청자는 상감된 무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유약이 투명해지며, 이에 따라 빙렬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1,200도가 넘는 온도에서 도자기를 다 구운 후, 며칠 동안 가마 안에 식히면서 두게 되는데 이때 가마 안에서는 급격히 차가워지는 온도를 버티지 못하고 안에서 쩌저적, 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도자기 표면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때가 빙렬이 자연스럽게 생기는 시기이다. 

 

청자철채퇴화운학문매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 청자철화풀꽃무늬매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 청자상감버드나무물새무늬매병,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감청자가 발달할수록 본래 고려청자를 상징하던 비색은 변하게 되고, 14세기를 지나면서 중국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고려청자의 제작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국가의 내정이 불안하니,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며 기법이 간소화되기 시작한다. 철화 안료를 뒤덮은 청자를 제작하거나, 회반죽을 이용한 회청자 혹은 분청사기와의 중간 지점에 있는 듯한 청자들이 생산되기 시작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고려의 쇠퇴와 국외의 불안한 정세, 왜구의 침략, 원의 간섭 홍건적 등으로 인하여 점차 간소화된 분청자를 생산하고 실용화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