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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미술/고미술 도자기 이야기

백의 민족을 상징하는 조선시대의 상징 - 조선 백자 이야기 (15-16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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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설명하였다 싶이 14세기에 고려가 끝나며 15세기말부터 조선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는 자연스레 고려를 상징하는 고려청자에서 새로운 국가의 탄생과 함께 조선만의 독자적인 도자기를 만드려는 시도로 이어지게 되었다.

 

청화백자운룡문병, 15세기, 리움미술관, 보물 785호

흔히들 고려청자가 끝나고 분청사기가 시작되며 분청사기의 인기가 사그러질 때 즈음 백자가 유행한 것으로 알 수도 있지만, 분청사기와 백자는 그 역사를 같이 시작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청화백자용문호, 15세기, 명나라

사실 백자 그리고 청화백자의 시작은 중국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후기의 상감청자의 뒤를 잇는 분청자가 주를 이루었으나, 원나라 명나라 시대에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화려한 청화로 그려진 하얀 백자는 조선 왕실에는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중국의 청화백자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백자 상감연화당초문완, 15세기, 연질백자의 표본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백자를 만들기 위한 주 재료인 고령토를 아직 사용하지 못하였고 대부분은 백토로 빗은 후 자토를 이용하여 상감한 후 백자 유약을 바르고 구운 형태인데... 이게 참 우리가 알고 있는 백자와는 사뭇 다른 초기 백자의 형태라 볼 수 있다. 누리끼리 하다 아백색 태토에 자토를 새긴 상감백자는 1440-70년대 15세기 중후반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러던 중 양구에서 백자를 생산 가능케 하는 고령토를 발견하였고 이를 통해 우리가 흔히 아는 경질백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청화백자매죽문호, 15세기, 호림박물관

청화백자는 왕실과 사대부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청화안료는 정말 구하기 힘들었다.

아라비아를 통해 명나라로 들어왔고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수입하는 실정이라 더욱 청화백자는 만들기 어려웠다.

 

명나라의 해금정책으로 청화안료 수입이 불가능해지자 조선 역시 1440년대 이후 청화안료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러한 동안 생산된게 위 사진의 연질백자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가 되며 조선의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굽는 왕실 사기제조장이 생겼는데 이를 '관요 (분원)'이라 칭한다.

분원은 주기적으로 나무가 무성한 곳을 따라 주기적으로 옮겼는데, 10년주기로 나무를 심고 옮기는 것을 반복하여 결국에는 경기도 광주로 다시 돌아와 분원을 운영하는게 가능하였다.

 

청화백자 매조죽문호, 15-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에서 건너온 아라비안산 청화안료는 회회청이라 불렀으며 후에 국내에서 발견된 청화안료는 토청이라 불렀는데 이는 육안으로 식별이 어려우며, 15세기 후반 청화백자 성립기에는 청화안료가 귀하여 도화서 화원이 분원으로 내려와 직접 도안을 그리기도 하였다.

 

위아래 연판문 같은 띠가 사라지고 중요한 주제가 되는 도안들만 전면에 그려지기도 하였다. 

 

순백자반합, 16세기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까지는 설백색의 유약을 뒤집어 쓴 내가 아주 사랑하는 순백자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와우 정말 이쁘다 

 

순백자주병, 15-16세기

유교 정신을 보여주는 듯한 하얀 순백자들이 사랑받는 시기였다.

위의 백자 주병은 전형적인 조선 초기 순백자 주병의 진수를 보여주는 모양과 유약색을 띄고 있다.

 

갑발

최상급의 백자를 굽기 위해 번조 중 백자를 보호하기 위해 1400도 이상에서도 견디는 내화토로 만든 '갑발'을 사용한다. 특히나 이러한 갑발을 이용한 번조 방법을 갑번이라고 하는데 왕실용 백자의 경우 반드시 갑번을 하였다.

 

왕실 뿐 아니라 관청이나 일반 사대부들도 백자를 사용하기를 원하였는데 이러한 용도의 백자들을 '상사기'라고 불렀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상사기들은 갑발까지는 아니고 포개구이 방법을 이용하였다. 

 

15-16세기에 걸쳐 진행된 조선 백자의 태동기는 이후 유교 숭상으로 인하여 더욱 다양한 순백의 색을 보여주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