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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술/한국 근현대미술

1. 한국 추상화의 발전 (한국 근현대미술의 태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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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모도 대련, 장승업, 19세기 / 기명절지도, 조석진, 1907

대한민국의 추상화의 시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1910-1945)의 예술부터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대한민국에 행해지던 강제적인 산업화 혁명은 서양의 기술 뿐만이 아닌 서양의 문화 또한 원치않게 전달이 되었다. 그 시기에 유명했던 당대의 작가들로는 오원 장승업 (1843-1897)과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라 일컬여지는 두 화가 소림 조석진 (1853-1920)과 심전 안중식 (1861-1919)가 있었다. 대한민국이 서양의 추상미술을 알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동양화 스타일을 기반으로 하는 옛부터 행해져오던 전통적인 수묵화 기법을 사용한 작품들이 대부분을 이루었다. 일제에 의하여 행해진 대한민국의 산업화를 통하여, 서양의 예술 이론들이 유입되고 소개되기 시작하였고, 당시에 활동하고 있던 국내의 예술협회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내 정부 주도하에 열리던 전시회의 숫자도 극히 적었으며,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전시회라 하더라도 일본인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하거나, 혹은 한국인 작가가 그린 일본 화풍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한국인 작가로서 일제강점기 시기에 열린 전시회를 통하여 등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국내의 실정과는 달리, 집안이 부유한 작가들은 반대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내 있는 미술학교를 통하여 서양미술을 간접적으로나마 접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젊은 한국 작가들에게 있어서 일본에서 공부하는 것이 서양의 최신 예술을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대한민국 예술계가 일제감정기라는 역사적 아픔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일본 예술계 또한 한국과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사나다 히사키치의 초상, 키시다 류세이, 1913 / 유영국 (좌) 김환기 (우)

일본 미술계는 20세기 초반부터 이미 서양 미술의 큰 영향을 받은 상황이라, 일본 미술 자체의 정체성을 잃고 서양의 인상파 화풍을 따라하는 작품들과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에 반발심을 갖게 된 일본의 젊은 작가들 또한 서양 미술의 극심한 영향력을 우려하였으며, 유럽에서 새롭게 유행하고 있던 '비표현적'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본의 예술학교들 또한 젊은 작가들의 진보적인 성향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이러한 실험적인 움직임은 그 때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비표현적' 예술로 이끌게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유영국 (1916-2002)과 김환기 (1913-1974)가 대표적인 한국의 1세대 비표현적 추상주의 (앵포르멜, Informel)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론도, 김환기, 1938 / Work 4 (L24-39.5), 유영국, 1970에 다시 제작된 작품

이 두 작가들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초기 화풍을 보여주고 있는데, 김환기는 일본예술학교, 유영국은 일본문화학교라는 다른 교육기관에서 공부한 것을 보면, 유럽의 추상미술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같은 시대에 공부하면서 다른 표현 방법으로 나타낸 것을 알 수 있다. 김환기의 론도는 전체적인 구성이나 대상들이 색의 대비를 통하여 표현되고 있으며, 색과 선을 통하여 나뉘어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듯한 표현법을 볼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유영국의 작품은 (재현품) 나뭇결이 보여주는 오묘한 선과 다른 색상들을 겹치거나 배열하여 간단하면서도 입체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김환기의 론도는 도쿄에서 열린 자유예술가들 협회의 두번째 전시 (1939)에 전시된 적이 있으며, 해당 협회의 세번째 전시회에 유영국의 작품 또한 전시되었다. 

 

Composition II in Red, Blue, and Yellow, Piet Mondrian, 1930

김환기와 유영국의 두 작품은 피에트 몬드리안 (1872-1944)의 기하학적이면서도 구성학적인 그림들이 떠오른다. 몬드리안의 작품에 대하여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화풍이나 시기적으로 보아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일본 예술계에서 전시되었던 한국의 추상화 작품들은 국내 예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한국의 추상화 '한국 엥포르멜' 열풍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대한제국 시절, 정부 주도하에 대한민국 예술 작가들을 위한 '조선미술 전람회 (선전)'이라는 전시회가 꾸준히 열리고 있었으며, 이는 후에 대한민국 근현대 예술 역사에서 꾸준히 등장하게 되는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조선미술 창간호, 1958

우선 '조선미술 전람회 (선전)'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매년 일제치하 조선 정부의 주도하에 열렸으며 1922년부터 해방 1945년까지 매년 열린 전시회였다. 선전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운영은 일본 내의 국립 전시회인 '문전'의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하였으며, 이 선전 자체를 일본의 문화를 한국에 전파 혹은 세뇌하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한국인에 대한 사회적인 차별은 이 선전이라는 전시 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선전의 작품 선정 위원회 및 중요 인사들은 모두 일본인 평론가들과 예술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선전에 출품되는 작품들 또한 반 이상이 일본인 작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되었다. 아쉽게도 선전이라는 전시회가 이 때 당시 한국 작가들에게는 한국 예술계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관문이었으며, 선전의 위원회는 한국인 작가를 띄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한 선전의 위원회들은 일본 내에서 성행하던 유럽의 인상파 화풍을 지향하는 취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대부분의 선전의 수상작들 또한 위원회의 취향에 맞는 작품들로만 선정되기 일쑤였다. 한국인에 대한 차별과 보수적인 선전의 시스템은 한국의 진보적인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 큰 걸림돌이었으며, 선전을 통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1945년 해방 후, 한국의 예술학교들은 문제시 되었던 선전의 시스템을 바꾸고자 새로운 이름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이라 명명하고, 한국의 젊은 작가들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폐림지 근방, 류경채, 1949 / 선소운, 박노수, 1955

해방 후 새롭게 단장한 국전의 첫번째 수상작으로써, 류경채 작가의 폐림지 근방 (1949)가 선정되었다. 비현실적으로 표현된 풍경과 구성들은 추상적이면서도 대비되는 색감을 통하여 뒤틀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과 다른 실험적인 국전의 행보에 젊은 한국의 작가들은 한국 예술계의 부흥을 꿈꾸며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다. 대부분의 한국 작가들은 한국전쟁에 징집되었으며,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의 미술계는 그야말로 암흑기로 칭해졌다. 한국전쟁 후 국전이 다시 열리기 시작하였으나, 이전의 보수적인 화풍의 작품들이 선정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다. 국전의 위원회 구성원들이 선전 시절의 일본인들이 아닌 한국인들로써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국전의 4번째 전시의 수상작인 박노수 작가의 작품처럼, 고전적인 화풍의 작품들을 띄워주기 시작했다. 

 

이는 국전이 아직 고전적인 화풍을 고수하고 있으며, 젊은 작가들 주도하에 이루어진 실험적인 작품들을 지양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이러한 국전의 보수적인 태도는, 위원회의 중요 인사들이 대부분 선전 시절에 수상 경력이 있는 한국의 원로작가들로 채워진 것이 이유였으며, 젊은 한국 작가들의 진보적인 화풍과 예술계 진출을 저지하려는 듯한 모습들로 보였다고 한다. 아직도 폐쇄적인 국전의 시스템 덕분에 젊은 작가들은 그들의 실험적인 화풍을 시험할 전시회가 없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으로부터 온 추상 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엥포르멜 화풍이 대한민국으로 전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