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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미술/한국 근현대미술

2. 한국 엥포르멜 (Korean Informel) 운동의 시작 (한국 추상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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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kson Pollock and Lee Krasner in Pollock's studio in The Springs, New York, 1950, Hans Namuth

한국 근대 화풍의 한 획을 그었으며, 현재 각광받는 '단색화'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엥포르멜 (Korean Infromel) 화풍은 크게 두 가지 화풍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첫번째는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치적 역사적으로 큰 연관이 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냉전시대 (1950-1970) 동안 한국에 정치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끼친 미국으로부터의 문화적 교류가 한국 엥포르멜을 발전하는 데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전 세계를 무대로 정치적으로 위상을 떨쳤으며, 또한 경제적으로도 급성장을 하였다. 세계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리더로서 소련 연방과의 라이벌 구도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는 새로운 국제적 아방가르드 (전위예술) 운동으로서 미국의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 이론을 퍼뜨리고 공산주의에 맞서는 하나의 선전물로써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Blue Poles (original title: Number 11, 1952), 1952, Jackson Pollock / Composition, 1955, Willem de Kooning

특히나 그 시대에 각광받던 추상 표현주의 화풍을 이끌고 있는 젊은 두 작가, 잭슨 폴록 (1912-1956)과 윌리엄 드 쿠닝 (1904-1997), 의 자유로우면서도 거침없는 움직임을 보여주는 화풍은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상징하면서도 퍼뜨리는데에 좋은 매개체로 여겨졌다. 미국 정부의 주도하에, MOMA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를 중심으로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유럽의 여덟 국가들의 도시들을 돌며 폴록과 드 쿠닝을 포함한 20명의 미국 작가들을 포함한 "미국의 모던 아트"라는 전시회를 개최하며 냉전 시대에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를 널리 퍼뜨리는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미국 정부가 의도한 대로 문화적으로 민주주의적 성향과 자본주의적 문화를 전파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미국 추상 표현주의가 지닌 거침없으며 자유로운 표현력과 대담함이 느껴지는 색감은 하나의 새 화풍으로써 환영받았다. 

 

사색, 1957, 하인두 / 추상, 1970, 하인두

이러한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는 대한민국 예술계에도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 정부의 주도 하에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적 교류를 위하여 주한 미국 공보원 'USIS' (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 United States Information Agency, 후에 U.S. Agency for Global Media라는 이름으로 변경 및 활동하게 된다)가 설립되었다. USIS의 역할은 앞서 말했듯 냉전 시대에 펼쳐진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미국 예술문화의 전파가 주된 역할이었지만, 실상은 예술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된 민주주의 전파 및 자본주의 시장의 확장이었다.

 

국내에서 USIS의 활동 중 하나는 영어 원서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미국 내에서의 예술적 움직임이나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활동을 했었으며, 또한 1957년에는 '미국 현대회화 조각 8인 작가전 (Eight American Artists)' 이라는 전시회를 덕수궁 국립박물관에서 개최하였으며, 이는 한국에서 열린 첫 추상표현주의 전시로 평가받고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의 USIS의 설립과 활동이 보여주는 것은, 문화적 구호 차원의 명목으로 이루어진 추상 표현주의의 전달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뚜렷하게 가진 이데올로기 전파를 수행하는 미국 정부기관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욱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1순위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USIS를 통하여 같은 시대에 예술 활동을 하던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The Busy Life, 1953, Jean Dubuffet / Sacking and Red, 1954, Alberto Burri 

한국 추상주의 화풍 형성에 미국 추상 표현주의가 대한민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으나, 유럽 내 특히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엥포르멜' (Informalism 혹은 Art Informel) 화풍은 대한민국 예술계에 추상 표현주의보다 더욱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미국 정부의 주도 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추상 표현주의와는 다르게 프랑스의 엥포르멜 화풍은 일본을 통하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950년대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국전의 폐쇄적인 시스템과 기득권의 전통적인 화풍에 대한 보수적인 태도로 인하여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일본의 예술 사회가 현재 시대를 관통하는 최신 트렌드를 경험할 수 있는 통로였다. 

 

Architecture, 1963, Antoni Tapies / It’s All Over, 1946–47, Wols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엥포르멜 화풍은 1952년 프랑스의 예술 평론가 Michel Tapie (1909-1987)에 의하여 주창된 화풍이었다.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초현실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화풍은 파리에서 가장 떠오르는 현대 미술 화풍으로써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엥포르멜 운동은 안타깝게도 동시대 또 다른 최신 화풍인 미국 추상 표현주의가 전 세계 미술 시장에 막대한 파급력을 일으키면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금방 잊혀지게 되는 비운의 예술 화풍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근데 참 이게 인생은 알 수가 없는게 파리를 비롯한 유럽 내에서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하던 엥포르멜 화풍이 일본의 구타이 예술 협회 (Gutai group / 설립자: 지로 요시하라 Jiro Yoshihara (1905-1972))에 의해 성공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소개되게 된다. 일본 또한 새로운 화풍 혹은 젊은 작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실험적인 시도 등에 목말라 있던 상황이었으며, 구타이 예술 협회의 젊은 추상화가들과 설립자인 요시하라는 유럽에서 건너온 이 실험적인 화풍을 수용하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후 1958년, 도쿄에서 '새로운 시대의 국제 예술: 엥포르멜과 구타이 (International Art of a New Era: Informel and Gutai)' 라는 전시회를 시작으로 1950년대 후반을 장식하는 하나의 화풍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제사 Rite, 1964, 김창열 / 해체 Deconstruction, 1998, 김창열

대한민국에서의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와 프랑스의 엥포르멜이 발휘한 영향력은 젊은 작가들과 평론가들을 고무시켰다. 이 중 한국의 예술 평론가인 방근택 (1929-1992)의 주도 하에 본격적으로 위 두 화풍들이 전해지게 되면서, 한국적이면서 한국만이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인 화풍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방근택은 USIS에서 제공하는 수많은 책들과 잡지들을 접하였고, Michel Tapie가 프랑스 엥포르멜에 대하여 저술한 책인 'Un Art Autre (1952)'를 통하여 추상 표현주의와 엥포르멜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더 나아가 젊은 한국 작가들을 위하여 예술 수업을 일본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고전의 율, 1969, 하인두 / 혼불-빛의 회오리, 1989, 하인두

방근택의 추상주의를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들은 당대의 젊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특히나 그 중에서도 김창열, 하인두, 박서보 세 작가들에게 영향력이 전해지게 되었다. 한국 엥포르멜이라고 명명하게 된 이 젊은 화풍의 작가들은 기하학적 구성을 따르면서도 거칠면서 윤율과 절제가 느껴지는 초기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 국내 추상주의 화풍의 시작으로 여겨지는 엥포르멜 화풍을 통하여, 후에 세 작가들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회화 No.1, 1957, 박서보 / 묘법 No.43-78-79-81, 1981, 박서보 

아쉽게도 그 때 당시 대한민국의 보수적인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전)'의 기득권 작가들은 엥포르멜을 주창한 젊은 작가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보수적인 국전에 대한 반감을 가진 작가들과, 엥포르멜 화풍을 표현하기 시작한 실험적인 젊은 작가들이 모여 반국전을 외치며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띄게 되었으며, 이는 1950년대 말 한국 예술계의 화두로 여겨졌다. 이러한 국전에 대한 반감들이 모여, 저항의 의미로서 대한민국의 젊은 작가들은 '미술가 협회 (미협)'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게 되고, 활동했던 짧은 기간 (1956-1961) 동안 여러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당시 국전의 전시는 대부분 덕수궁 내에서 열리는 게 대다수였다. 1960년, 국전의 전시가 한창 열리는 날, 미술가 협회가 주도한 '벽전'이라는 전시회가 동시에 열렸다. '벽전'이라는 전시회는 이름과 동일하게 국전의 전시가 열리는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벽에 그림을 걸고 전시회를 진행한 사건이었다. 국전이 주도하는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시스템에 반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였던 전시회였다. 

 

미술가 협회에 의하여 진행된 '벽전'의 모습 / 항아리와 날으는 새, 1958, 김환기

'벽전'을 시작으로 진보적이고 실험적이었던 엥포르멜이 한국 예술계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했으며, 1960년대 말까지 엥포르멜 화풍은 한국 예술계를 주도했던 스타일로 평가되고 있다. 1960년대가 지나면서, 엥포르멜을 주창하던 젊은 작가들은 또 다른 새로운 화풍을 찾기 시작했다. 기하학적 구성과 담대한 색의 대비를 주축으로 표현한 엥포르멜 운동은 그 후에 발현된 '단색화'라는 화풍을 촉진하는데에 전신으로서 그 역할을 다 했으며, 이러한 예술적 바통은 엥포르멜의 예술적 가치를 단색화로 확장시킨 핵심 주창자인 김환기 (1913-1974)에게 전달되었다.